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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진작가

Alfred Stieglitz,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

by VIIN-11 2022.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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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1864년 미국에서 독일계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독일에서 공학 및 사진을 공부했고 헤르만 빌헬름 포겔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헤르만 빌헬름 포겔은 염료 감작을 통해 정색성 필름을 발명했고 적색까지 감도를 추가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여 사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화학학자이자 사진작가입니다. 스티글리츠는 포겔에게 사진에 대해 배우며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스티글리츠는 초반에 포겔에게 화학을 배운 바와 같이 사진의 기능과 카메라의 기술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사진과 사진가에 관련된 책을 모았고 시골의 풍경과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1883년 베를린에서 첫 작업을 한 그는 당시 전통적인 사진 경향을 따랐고 사진을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1890년 스티클리츠는 뉴욕으로 돌아갔고 새로운 방식의 현상법과 빛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곧 조셉 케일리와 함께 젤라틴 인화법을 활용한 '순수 사진'을 고안해냈습니다.

1890년대 스티글리츠는 영국과 독일의 사진 관련 간행물에 사진의 기술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에 대해 글을 게재했습니다. 스티글리츠는 1887년 <마지막 농담>이라는 사진으로 아마추어 사진가에서 수상한 이후 여러 매체에 그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또한 1893년 스티클리츠는 눈을 촬영한 사진으로 그의 명성을 더욱 높였습니다. 스티글리츠는 1893년 <아메리칸 아마추어 포토그래퍼>, 1897년 <카메라 노트>와 같이 사진과 관련된 책도 발행했습니다.

1896년 스티클리츠는 '뉴욕 카메라 클럽'의 부회장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진작가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며 클럽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도 참여했습니다. '뉴욕 카메라 클럽'은 <카메라 노트>라는 잡지를 만들었고 1897년부터 발행되었으며 스티클리츠는 편집자의 역할 또한 맡았습니다.

스티클리츠는 이러한 활동과 함께 개인적인 사진도 계속해서 촬영했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 전시회를 열며 더욱더 이름을 알렸습니다. 

1902년 스티클리츠는 에드워드 스타이컨, 앨빈 랭던 코번과 함께 '사진 분리파'를 결성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카메라 워크>를 창간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사진과 미학 및 예술에 대한 비평, 전시회에 대한 평론 등을 개제했습니다. 1905년 스티클리츠는 뉴욕 5번가 291이라는 주소에서 착안하여 '갤러리 291'을 개관했습니다. '갤러리 291'은 당시 발행되는 신문과 유럽의 예술가들,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 사조를 미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스티글리츠는 사진계와 미술계의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1907년 대서양을 항해하는 배에서 스티글리츠의 가장 대표적인 사진이라고 불리는 <The steerage>을 촬영하였습니다. 1916년 스티글리츠는 미국 모더니즘의 어머니라 불리는 화가이자 사진작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마주했고 작품에 매료된 나머지 오키프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전시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를 알게 된 오키프가 스티글리츠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곧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뮤즈가 되었고 오키프를 모델로 많은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1926년 또 다른 스티글리츠의 갤러리인 '인티머트 갤러리'에서 오키프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훗날 스티글리츠는 조지아 오키프와 결혼하게 됩니다. 1924년 스티클리츠는 자신이 명예회원으로 속해 있는 왕립사진협회로부터 상을 받으며 사진예술을 위한 기록과 교육, 간행물 발행 등의 수많은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한편, 스티글리츠는 1929년 두 번째 갤러리인 '인티머트 갤러리'를 정리하고 '아메리칸 플레이스'라는 갤러리를 운영했습니다. 이 갤러리를 운영하며 스티글리츠는 자신의 사진 개념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1936년 뉴욕에서 앤설 아담스의 첫 번째 전시회를 준비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며 잡지 발행, 갤러리 운영 등 사진예술과 사진작가들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습니다. 1938년부터 심장마비와 협심증 등으로 건강상의 문제를 겪던 스티글리츠는 1946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오키프가 스티글리츠의 사진을 정리하고 골라내어 국립 미술관에 기증했습니다. 

 

2. 기능에서 미학으로

1890년대 스티글리츠가 제작한 <사우스 티롤 슈테르칭 거리>와 <태양광선, 파올라>에서 우리는 블라인드가 줄무늬를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스티클리츠의 노력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스티클리츠는 독일 장르 화가들로부터 이미지에 대한 이해와 연출과 관련하여 영향을 받았습니다.   

1900년을 지나며 스티글리츠는 회화주의에 반하는 사진의 리얼리즘을 지향하였고 순수한 기록적 특성을 주장하며 '사진 분리파'라는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사진 분리파는 상징주의와 빈 분리파를 두고 만든 명칭입니다. 프랭크 유진, 게르트루드 캐세비어 등의 '사진 분리파' 작가들은 사진의 모방적 특성보다 사진에서 표현되는 작가의 정신적, 감정적 표현을 중요시했습니다. 사진 분리파는 예술적인 미학 추구를 목표로 두었는데 스티글리츠는 독립적인 작가 고유의 지각 능력을 강조하는 사진 미학을 추구했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른 조작 없이 순수하게 촬영하길 원했으며 '스트레이트 사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때문에 스티글리츠의 사진은 사실주의, 순수주의라고 불리며 그는 카메라와 렌즈가 갖고 있는 기계적인 정밀함과 정확성이 사진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무엇을 바라보는지에 대해

The steerage by Alfred Stieglitz
The steerage by Alfred Stieglitz, commons.wikimedia.org

■The steerage

삼등 선실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사진은 스티글리츠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배의 구조물을 기준으로 일등선실과 삼등 선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진에 대해 일부는 두 선실에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항해를 대하는 태도, 마치 계급처럼 나누어진 구조물과 사람들의 위치를 사실적으로 드러냈다고 평가합니다. 한편 또 다른 일부는 스티클리츠가 카메라를 들고 이 장면을 찍게 된 계기는 그저 빛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나는 모자를 찍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Geogia O&#39;keeffe by Alfred Stieglitz
Geogia O'keeffe by Alfred Stieglitz, commons.wikimedia.org

■Geogia O'keeffe

스티글리츠의 뮤즈이자 아내였던 조지아 오키프의 초상사진입니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사진을 매우 열정적으로 촬영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스티글리츠의 후반 작업 중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를 모델로 촬영하며 오키프의 손과 발 등 신체의 일부를 확대하여 촬영하기도 하는 등의 실험을 했으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순수함과 객관적 진실을 기록하는 '순수사진'의 기준을 다시 한번 정립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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