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지
위지라는 가명을 썼던 아서 펠리그는 1899년 구 오스트리아령이었던 폴란드 즈로체브에서 태어났습니다. 1909년 위지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맨해튼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생활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상황으로 인해 위지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1904년 학교를 그만두고 시탕 판매원, 거리 사진가, 사진 판매상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그 후 여권 사진을 찍는 일을 하다가 1923년 일간지 사진 에이전시인 아크메 뉴스픽처스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위지는 암실 기사로 일했고 종종 야간 화재현장이나 재난 현장에 따라가 촬영을 보조했습니다. 1935년 위지는 프리랜서 보도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회사를 떠났습니다. 위지는 교통사고, 폭력 범죄, 화재 등의 사건을 따라다니며 촬영했고 사진을 타블로이드 신문사에 보냈습니다. 위지는 맨해튼 경찰본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38년에는 차에 경찰의 무전 정보를 수신할 수 있는 장치를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는 등 이를 통해 범죄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알 수 있었으며 범죄 현장에 때로는 경찰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위지는 사진을 신문사에 보낼 때마다 '유명한 작가, 위지의 사진'이라는 문구의 도장을 찍어 보낼 정도로 자신의 사진에 자신감과 확신을 가졌습니다. 경찰본부와의 협력은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타블로이드 신문은 신속성을 가장 중요시했기 때문에 위지는 5000건이 넘는 보도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범죄나 화재 사건뿐만 아니라 위지는 대공황 시기에 이로 인한 피해도 사진으로 기록하였고 대도시와 대공황의 폭력과 자비 없는 상황 등을 생생하게 남겼습니다. 1938년 위지는 이러한 도시상황과 대조되는 사교계의 상황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부유하고 타락한 부유층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이를 객관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위지의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1947년 위지는 할리우드로 거주지를 옮겼고 1945년에 발표한 위지의 첫 번째 사진집인 <벌거벗은 도시>를 영화로 제작했습니다. 위지는 영화산업에서 기술자 및 배우로도 활동하였고 <벌거벗은 할리우드>라는 사진집 발표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1952년 위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뉴욕에서 위지는 정치 및 사회분야의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캐리커처를 제작하고 직접 개발한 만화경에 위지스코프라는 이름을 붙여 작업에 사용했습니다. 1961년 <위지가 쓴 위지>라는 자서전을 발표했는데 그는 '참혹했던 10년 동안의 사진을 찍었고 내가 속속들이 알고 있고 사랑한 도시의 영혼을 촬영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진, 영화, 사진집 출간 등 노년까지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가던 위지는 1968년 미국 뉴욕에서 사망했습니다.
2. 누구보다 빠른 보도사진작가
위지는 어두운 현장을 담아내기 위해 주로 강한 플래시를 활용하였고 흑백의 대조를 극대화할 수 있는 명암의 대비를 이용하여 범죄와 재난현장을 효과적으로 생생히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위지는 특별히 사진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독학했으며 잠깐 동안 일했던 아크메 뉴스 픽처스에서 기술을 연습했습니다. 그럼에도 표현주의적인 연출과 함께 이러한 위지의 사진 기법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오늘날 보도 사진의 독특한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위지는 사진의 스타일이나 질감, 인화 시 품질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위지는 누구보다 빠르게 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영화 같은 한순간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의 차 안에는 여분의 카메라와 플래시 전구, 타자기와 갈아입을 옷 등이 보관되어 있었고 차 안이 곧 사무실이었습니다. 또한 누군가와 함께 사진 촬영을 하지 않고 혼자 작업을 했으며 살인, 범죄, 화재, 노숙과 같은 현장뿐만 아니라 축하 행사, 연인, 전쟁의 종식과 같은 행복한 분위기의 현장도 촬영했으며 다양한 현실에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포착했습니다. 위지의 작업과 그 기록을 두고 평가가 나뉘기도 하는데 일부는 돈을 벌기 위해 지나치게 선정적인 장면을 고르는 사진작가라고 평하며 또 다른 일부는 현장의 생생함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포착한 보도사진작가라고 평합니다.
3. 재난과 범죄의 현장에서
■Tenement fire
1942년 할렘의 어느 공동주택의 화재로 인해 건물을 보며 울고 있는 어머니와 딸의 모습입니다. 건물에는 사진 속 여성의 또 다른 자녀와 아기가 아직 갇혀있었고 위지는 이 사진을 촬영하며 그들과 함께 울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화재가 일어난 건물과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대원의 모습을 찍는 것뿐만 아니라 위지는 재난 현장의 피해자들의 감정을 생생히 기록했습니다.
■At a concert in Harlem
1948년 할렘의 어느 콘서트장에서 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환하게 웃으며 콘서트를 즐기는 사람들의 밝은 모습을 포착하여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지의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이입하여 슬픔과 행복을 함께 느끼게 했고 사진이나 현장과 관련된 기사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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